벌써 입추가 지나갔네요.
개학까지 한주 남짓 남은 이맘때가,
방학 내내 쌓아둔 걸 확인하는 시기예요.
상담에서 이 질문이 유난히 많이 나오는 것도
딱 지금입니다.
"선생님, 방학 동안 오답노트를
그렇게 열심히 썼는데
왜 똑같은 데서 또 틀릴까요?"
그래서 저는 아이의 그 오답노트를 한번 가져와 보시라고 합니다.
펴보면 대개 비슷해요.
문제 번호가 적혀 있고, 그 아래에 해설지 풀이가 깔끔하게 옮겨져 있습니다.
색깔 펜까지 써서, 솔직히 저보다 글씨가 예쁩니다.
그런데 그 노트에는 정작 그 학생이 시험지에서 실제로 쓴 풀이가 한 줄도 없습니다.
맞는 풀이만 모아둔 노트인 거예요.
맞는 풀이는 해설지에 이미 있습니다.
굳이 옮겨 적을 이유가 없죠.
같은 문제를 두 번 틀린 학생들을 보면,
두 번 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쪽으로 꺾습니다.
답을 까먹은 게 아니라,
그 문제를 보면
자동으로 떠오르는 첫 수가 있는 거예요.
그 첫 수가 잘못된 길이면
몇 번을 다시 풀어도 그쪽으로 갑니다.
지난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.
이차식 조건이 보이길래 판별식부터 세우고
한참을 헤맨 학생한테 왜 그렇게 시작했냐고 물었더니, 이렇게 답하더군요.
"이차식 나오면 원래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?"
바로 그 한마디가 오답노트에 들어가야 할 문장입니다.
정답 풀이가 아니라, 내가 그 길로 간 이유요.
오답노트는 맞는 풀이를 적는 곳이 아니라,
틀린 생각의 경로를 적는 곳입니다.
여기서 외고를 준비했거나 문과를 보고 있는 학생들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.
이 아이들은 이 훈련이 이미 되어 있어요.
국어 오답을 정리할 때 보면 이렇게 씁니다.
"나는 2문단을 근거로 읽었는데 근거는 4문단이었다."
"선지의 '모두'라는 말을 흘려봤다."
자기가 어떤 경로로 그 답에 도착했는지를
말로 되짚는 일에 익숙한 겁니다.
그런데 이 학생들이 수학 오답으로 오면
갑자기 그걸 안 해요.
수학은 말로 하는 과목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,
그냥 풀이만 옮겨 적고 넘어갑니다.
가진 강점을 옆 과목에 두고 오는 셈이죠.
저는 이 학생들한테 국어에서 하던 걸 그대로 가져오라고 합니다.
한 문제에 세 줄이면 충분해요.
1. 나는 어떤 조건을 보고 무엇부터 세웠는지.
2. 그 판단이 어디서 어긋났는지.
3. 다음에 같은 조건을 만나면 무엇부터 확인할 건지.
세 줄을 우리말 문장으로 씁니다. 식이 아니라 문장으로요.
이게 되기 시작하면 오답노트가 갑자기 얇아지고,
대신 다시 읽게 됩니다.
흔히 오답노트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데,
저는 한 가지를 꼭 나눠서 관리하게 합니다.
사고가 틀린 것과 계산이 미끄러진 것은
처방이 아예 다릅니다.
부호를 잘못 옮겨 적었다,
통분을 하다 분모 하나를 놓쳤다.
이런 건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손의 문제예요.
여기에 세 줄짜리 복기를 붙여봐야 쓸 말도 없고, 노트만 두꺼워집니다.
그래서 계산 실수는 문장 없이
한 줄 목록으로만 따로 모으게 합니다.
내가 자주 미끄러지는 지점만 쭉 적어두는 거예요.
이 목록은 시험 시작 직전에 훑는 용도고,
사고를 복기한 노트는 주말에 한 번 다시 읽는 용도입니다.
두 개를 한 노트에 섞어두면
결국 둘 다 안 보게 되더라고요.
방학 동안 틀린 문제가 이미 쌓여 있을 겁니다.
새 문제집을 한 권 더 사기 전에,
그 문제들부터 이 기준으로 훑어보게 해주세요.
하루에 두세 문제면 됩니다.
개학 전까지면 충분히 다 돕니다.
처음 며칠은 아이가 답답해할 수도 있어요.
풀이를 옮겨 적을 때보다 노트가 훨씬 안 채워지거든요.
저도 처음엔 그 빈 노트를 보고 이게 맞나 싶었는데,
몇 주 지나 같은 유형을 다시 만났을 때
아이가 먼저 "아 이거 그때 그 함정이네" 하는 걸 보고
생각이 바뀌었습니다.
개학하고 첫 시험에서 지켜지는 건
푼 문제 수가 아니라, 다시 안 틀리게 된 문제 수예요.
남은 2주, 노트가 두꺼워지는 대신 다시 읽히는 노트가 되면 좋겠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