여름방학이 한 주 지났습니다.
이맘때 상담에서 제가 꼭 하는 게 하나 있어요.
아이 개념서를 그 자리에서 펼쳐보는 겁니다.
거의 매번 똑같습니다.
앞 삼십 페이지쯤은 형광펜이며 연필 자국으로 새까만데,
그 뒤부터는 손도 안 댄 새 책이에요.
"방학 시작할 때
이번엔 진짜 끝내겠다고 했거든요.
결국 또 1단원이에요."
어머님은 아이 의지를 탓하십니다.
아이도 자기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고요.
저는 그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.
의지가 아니라 분량 설계가 잘못된 겁니다.
개념서를 한번 뜯어보면 구조가 보입니다.
1. 맨 앞에 개념 설명이 나오고,
2. 개념 확인하는 자잘한 문제가 붙고,
3. 그다음이 대표 유형 예제입니다.
여기까지는 아이들도 꾸역꾸역 갑니다.
문제는 그 뒤예요.
유제가 나오고, 연습 문제가 나오고,
실전 문제가 나오고, 기출까지 나옵니다.
개념이 아직 헐거운 3, 4등급 학생이
이걸 순서대로 다 풀면 한 단원에 몇 주가 걸립니다.
그러니 1단원에서 지치는 게
당연합니다
끝까지 간 아이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.
마지막 단원을 덮는 순간,
1단원 내용은 이미 반년 전 일이 되어 있거든요.
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,
또 1단원만 새까매집니다.
개념서를 못 끝내는 아이가 아니라,
끝낼 수 없게 설계된 진도인 겁니다.
그래서 저는 1회독 때
개념과 대표 유형 예제 딱 두 가지만 보게 합니다.
예제도 바로 풀게 하지 않아요.
문제와 해설을 한 덩어리로 놓고,
개념 읽듯이 한 줄 읽고 이해하고 또 한 줄 읽고 이해하면서
끝까지 따라가게 합니다.
이렇게 하면 막히는 구간이 안 생깁니다.
막히지 않으니 페이지가 넘어가고,
페이지가 넘어가니 아이가 처음으로
"이 책 끝낼 수 있겠는데" 하는 얼굴을 해요.
한 달째 1단원이던 아이가 몇 주 만에 목차 끝까지 가는 게 여기서 나옵니다.
이 방법을 알려드리면
꼭 이렇게 되받는 학생이 있습니다.
"그럼 문제 안 풀어도 되는 거네요?"
아닙니다.
손으로 안 푸는 건 1회독까지만입니다.
2회독에서는 "반드시" 연필을 들고 직접 풀어야 해요.
특히 내신은 계산 정확도와 서술 과정이 그대로 점수입니다.
눈으로만 따라간 풀이는 시험지 앞에서 손이 안 나갑니다.
머리로는 아는데 답이 안 나오는 그 상태,
시험장에서 제일 무너지기 쉬운 상태예요.
그리고 하나 더.
저는 연습 문제나 기출을 버리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.
버리는 게 아니라 미루는 겁니다.
1회독 동안 잠깐 옆으로 치워두는 것뿐이고,
2회독부터는 오히려 그쪽이 공부의 본체가 됩니다.
1회독을 마친 아이는 머릿속에 지도가 하나 생긴 상태입니다.
이 단원이 어디로 흘러가는지,
대표 유형이 몇 개인지 대충 알아요.
그 상태에서 유제와 연습 문제를 손으로 풀면
속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.
막혀도 당황하지 않고 "아, 이건 앞에서 본 그거" 하면서
스스로 돌아갈 줄 알거든요.
실전 문제와 기출은 그다음입니다.
작년에 가르쳤던 고2 학생 한 명이 딱 이 순서로 갔습니다.
방학 전까지 반년 동안 개념서 세 단원을 못 넘겼던 학생이에요.
1회독을 눈으로만 훑게 했더니
3주 만에 책을 덮더군요.
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.
2회독에서 연필을 들자마자 예제 절반이 안 풀렸어요.
본인은 꽤 충격을 받았는데,
저는 '그게 정상'이라고 말해줬습니다.
1회독은 원래 다 아는 것 같다가
2회독에서 무너지는 게 정상입니다.
중요한 건
그 학생이 이번엔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.
1단원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고,
막힌 그 유형만 찾아 되돌아갔습니다.
남은 방학이 3주 남짓입니다.
지금부터 1단원을 처음부터 다시 새까맣게 만드는 건
정말 아깝습니다.
오늘은 개념과 대표 유형만 들고
목차 끝까지 한번 달려보게 해주세요.
손으로 푸는 건 그다음에 해도
절대 늦지 않습니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