매년 방학 첫 주부터 상담이 몰리는데,
학생들 손에 들린 문제집을 보면 대충 답이 보입니다.
쎈 다시 한 번 돌리고,
유형서 한 권 더 사서
방학 안에 끝낼 거예요.
의욕은 좋습니다.
그런데 저는 이 계획에서 딱 하나가 늘 걸립니다.
어떻게 풀 거냐는 빠져 있고,
몇 권 풀 거냐만 있다는 거예요.
이걸 눈치챈 학생이 의외로 적습니다.
쎈이나 유형서를 펴 보면,
문제 위에 유형 이름이 딱 적혀 있죠.
'이차함수의 최대·최소', '판별식의 활용'
이런 식으로요.
그게 바로
이 문제를 풀 때 꺼내 써야 할 개념을
미리 알려주는 커닝페이퍼라는 겁니다.
수학을 잘하려면
"이 문제, 내가 배운 개념 중에 뭘 써야 하지?"
를 스스로 떠올리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.
그런데 유형서는 그 과정을 대신 해버려요.
그러니 아무리 여러 권을 풀어도,
개념을 꺼내 쓰는 연습은 한 번도 안 하는 셈입니다.
문제는 유형으로 외워지고,
시험장에서 유형 이름이 안 적혀 있으면
그대로 얼어붙죠.
작년 여름에
쎈을 세 번 돌렸다는 고2 학생이 있었는데,
제가 유형 이름을 손으로 가리고
한 문제를 내밀었더니 손을 못 대더군요.
세 번을 푼 게 아니라,
세 번을 본 거였어요.
방법은 허무할 만큼 간단합니다.
문제 위에 적힌 유형 이름과 개념 힌트를,
긴 포스트잇 한 장으로 덮어버리는 겁니다.
그리고 문제를 만나면 바로 펜을 들지 마세요.
조건을 하나하나 눈으로 읽으면서,
"이건 무슨 개념을 써야 풀리지?"를
1~2분 먼저 떠올립니다.
여기서 아무것도 안 떠오르면,
그건 개념이 아직 내 것이 안 됐다는 신호예요.
포스트잇에 "개념 못 떠올림"이라고 살짝 적어두고,
그때 살짝 들춰서 힌트를 확인하면 됩니다.
이 한 장이 하는 일이 생각보다 큽니다.
내가 뭘 아는지, 뭘 모르는지가
문제를 풀기 전에 먼저 갈리거든요.
풀다가 막히는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.
바로 해설로 도망가지 말고,
최소한 몇 분은 붙잡고 버텨보세요.
그렇게 고민한 뒤에 본 해설은,
그냥 눈으로 훑은 해설과
머리에 남는 깊이가 완전히 다릅니다.
원래 "막히면 5분에서 10분은 고민하라"고들 합니다.
맞는 말인데,
솔직히 3~4등급 학생한테 이건 좀 막연해요.
그냥 멍하니 5분 버티는 건 방학 시간만 잡아먹습니다.
그래서 저는 시간 대신 질문 세 개를 쥐여줍니다.
1) '해설을 봐야 답이 나오는 유형인가',
2) '조건을 정말 다 썼나',
3) '이 문제가 나한테 물어보는 게 뭔가'
이 세 개를 스스로 물어보다 보면
5분은 저절로 채워지고,
버티는 게 훨씬 덜 괴롭습니다.
그리고 복습은 방학이라 오히려 하기 좋습니다.
한 주 동안 포스트잇으로 씨름한 문제들을,
그다음 주말에 깨끗한 종이에 다시 풀어보세요.
연속 두 번 맞으면 그 문제는 졸업,
다시 안 봐도 됩니다.
한 주 벌고, 주말에 회수하고.
이 리듬이 방학 40일 동안 쌓이면,
문제집 권수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게 남습니다.
새 문제집 사러 서점 가기 전에 문구점부터 들르세요.
긴 포스트잇 한 통이면 충분합니다.
그거 한 장으로 가리는 순간,
지금 있는 문제집이 완전히 다른 교재가 됩니다.
P.S. 포스트잇은 꼭 '긴 것'으로 사세요. 짧은 건 유형 이름이 삐져나와서 다 보입니다.